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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TV 방송 리뷰

고려 거란 전쟁 : 현종의 몽진길 공주에서 무슨 일이? (고려 역사를 바꾸다) 현종이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을 떠난 날이 1010년 음력 12월 28일, 양력으로는 2월 3일로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원정왕후와 같이 몽진을 떠난 현종이었으나 천안에서는 갈라서야 했다. 임신한 몸으로 함께 가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진을 떠난 지 3일 만에 개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개경에 침입한 거란군은 궁궐, 민가 등을 불태우고 개경을 점령했고 현종을 잡기 위해 계속 남하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현종이 도착한 곳은 아름다운 금강이 흐르는 충남 공주 곰나루였고 이곳에서 공주 절도사 김은부가 예를 갖추어 현종을 맞이했다. 피란길에 유일하게 현종을 환대했던 이가 김은부였다. 그러나 현종은 이곳에 계속 머물수는 없었기에 전남 나주까지 내려간다. 그리고 나주에 도착하자마자 .. 더보기
드라마 연인 속 주화파 VS 척화파 논쟁 , 광교산 전투 , 그리고 ... 주화파 대표적 인물 최명길이 있다. 척화파의 대표 인물 김상헌이 있다. 인조 옆에 주화파의 특징은 실무가 중요한 현실주의자들이었고 청과의 전쟁을 막아 현실적 피해를 줄이는데 주력하고자 했던 세력이었다. 반편 척화파의 특징은 명분이 중요한 원리주의자 세력으로 조선의 입장에서 어떤 게 정의고 합리적인 건지 고려했던 세력이었다. 당시는 국제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수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라의 존망과 직결된 문제를 두 세력모두 쉽게 결정할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사이 왕을 지키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오던 근왕군들은 패배를 이어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혹한기까지 이어져 줄줄이 병사들은 병들고 얼어 죽어갔다. 광교산 전투 그러나 모든 전투에서 패한것은 아니다. 병자호란 속에 손에 꼽는 대승 광교산 전투.. 더보기
드라마 연인의 이장현은 실존인물? 이장현이라는 인물은 없고 '장현' 이라는 인물이 있다. 성이 장 이름이 현 장현 역관 출신에 집안은 대대로 역관 집안으로 당대 최고 부잣집의 아들이다. 인조부터 숙종 때까지 두루 활약했던 장현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갈 당시 장현도 같이 동행하게 된다. 심양에 머물며 주요 인물과 은밀히 교류하며 당시 정세 파악에 큰 도움을 줬다. 이후 그 공로로 수석역관은 물론 수임으로 있던 40년 동안 연경에 간 것이 30여 번이고 여러 공무에 있어 그의 주선에 힘입은것이 많았다. 장현의 외모 또한 풍채가 좋고 사무 처리에 부지런하였다. 통문관지 내용을 보면 잘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보기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배경 설명 : 거란이 고려를 공격한 이유 인물설명 고려 거란의 26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현종과 강감찬의 이야기이다. 993년~1019년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전쟁, 고려 제 8대 황제 현종역으로 제국의 아이들 김동준이 나온다. 고려는 최종이 세웠다가 유동근에게 망한 나라.. ㅋㅋ 통일신라 말기 왕족의 분열로 혼란에 빠진 신라는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스타, 호족들이 스타로 떠올랐다. 궁예, 왕건, 견훤이 중심이되었고 최후의 승자는 왕건이었다. 왕건은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워 나라의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공표한다. 그러나 고려는 존속하는 내내 외침을 격게 된다. 고려거란전쟁에서 강감찬역을 맡은 최수종이 맡았다. 기록에 따르면 강감찬은 체구가 작고 얼굴이 못생겼으며 옷차람은 더럽고 낡아서 보통 사람보다 못했다고 나와 있다. 거란이 고려를.. 더보기
드라마 < 7일의 왕비 > 단경왕후는 누구?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 주인공 드라마 7일의 왕비는  조선 11대 왕 중종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연산군 이복동생 진성대군 중종은 총 3명의 비를 맞이하게 되고 박민영 배우가 했던 역할이 단경왕후(1487~1557)로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다. 단경왕후 집안 단경왕후 신 씨는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원부원군 한 씨의 딸로 조선시대 역대 왕비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비이다. 그녀의 집안 거창 신 씨는 성종과 연산군 때 권력을 잡고 있던 최고의 명문가로 그녀의 고모는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 씨, 아버지 신수 군은 좌의정으로 연산군의 처남, 작은어머니가 예종의 비 안순왕후의 여동생일 정도로 조선 역대 왕비를 통틀어 보기 드문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리고 단경왕후는 13세의 나이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과 혼례를 올리게 된다.. 더보기
고종 아관파천 이후 상황 (을미사적은 어떻게 되었나? ) 아관파천 배경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이후 일본을 견제할수 있는 세력 러시아를 얻게 된다. 아관파천이 성공한 것에는 을미사변이 배경이 되고 있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실이 밝혀진 상황이어서 민심은 복수심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을미사변 역사저널 393회 을미사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인에게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다. 1895년 주상전하-> 대군주 폐하, 왕비전하-> 왕후 폐하로 변경 , 1897년 황제의 나라 대한 myvoice.wissue.net 을미사변 직후 김홍집 내각이 실시한 개혁운동인 을미개혁이 시행되었고 단발령이 내려진다. 단발령 강제 시행으로 의병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의병의 확산으로 인해 진압을 위해 관군이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 더보기
창경궁 경춘전 /창경원이 된 이유 창덕궁과 창경궁은 숲에 둘러싸여 있다. 숲에 가려져 있어 주거 환경에 적합했다. 창경궁은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와 어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궁으로 여인들이 살기 좋게 만든 공간이다. 여인들이 있으니 왕은 따라가기 마련이다.   창경궁 경춘전창경궁은 궁중 암투의 주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장희빈과 인수대비(연산군이야기)가 머물렸던 곳이다. 인수대비가 살았던이 창경궁 경춘전이다. 이곳에서 인수대비는 사망했다. 그 이후에 약 200년 후 인현왕후가 기거했다가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약 70년 후 사도세자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태몽은 용꿈이었다. 정조가 태어난 곳 또한 경춘전이다.  정조도 이 건물은 아버지 사도세자와의 사연이 있는 곳이라 애착이 많았었다. 정조 즉위 후 어머니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전.. 더보기
안창호의 호가 도산인 이유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가면서 일본은 하와이 한인 이민자를 관리하겠다고 했고 이에 대한 하와이 내 반일 감정이 격화되었다. 그래서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독립운동 중심으로 변모하게 되고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하와이 이민사회였다. 이때 안창호 선생도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안창호 선생의 호가 도산인 이유는 하와이에 도착을 했을때 섬 오른쪽에 다이아몬드 헤드라는 지형이 있다. 도산 선생은 이것을 보고 굳건하게 저 산처럼 독립운동을 해야했다는 생각으로 섬 도, 산 산을 써서 도산이라고 호를 지었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 서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하와이와도 연결해 운동을 했다. 더보기
국정원 (국가정보원) 채용기준 / 블랙요원, 화이트요원 차이 이만갑 580 회 내용국가정보원은 1961년 중앙정보부에서 1980년 국가안전기획원, 1999년 국가정보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국정원의 가장 큰 임무는 대북 첩보활동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김종필이 역임했다. 그러나 이 기관이 북한을 대상으로만 정보활동을 해야하는 데 변질돼서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도 수행하면서 2020년 국가정보원법 개정을 통해 ' 국내 보안정보' 를 삭제하였다.  국정원 채용기준?  국정원 채용 대상은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지원 가능하다.  - 전공보다 중요한 성향을 보는데 애국심이다. 헌신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국가를 위해 일을 해도 본인이 했다고 말할수 없다. 음지에서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당히 큰 조건이다. 목숨을 바쳐도 업적을 알릴 수 없는 이름 없는 별이 .. 더보기
태종 이방원 조선 역대 임금 중 후궁을 가장 많이 들인 이유 22회 이방원은 즉위식을 하고 원경왕후와의 기싸움 끝에 민씨를 왕비로 책봉한다. 22회는 원경왕후의 세력인 외척을 제거하기 전 상황을 그리고있다. 22회 주요 내용 원경왕후는 나무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종 이방원의 신하가 되라는 요청을 끝까지 거절하고 궁궐로 아이들을 앞세워 들어왔다. 또한 신하들로 하루 빨리 왕비를 책봉하라는 고하니 이방원은 마지못해 민씨를 왕비로 책봉한다. 그러나 이후에 이방원은 왕비를 찾지않고 후궁을 들이기 시작한다. 심지어 원경왕후의 시녀를 후궁으로 삼아버리면서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또한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후궁을 들이는 여색에만 빠져있다는 상소를 올린 이를 추궁해 그의 입에서 배후로 여흥부원군 민제 대감이라는 이름이 실토되면서 외척 제거를 위한 밑거름을 마련한다. 태종은 왕..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