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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벌거벗은 세계사

이토 히로부미는 테러리스트였다. (존왕양이 사상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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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야마구치현은 일본에서 총리가 가장 많이 배출된 지역으로 아베 전 총리, 아베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등 역대 총리가 68명 중 9명이 배출이 된 곳이다. 일본 장기 집권 총리 1~4위가 모두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이곳은 근대 일본 정치사의 뿌리인 지역이다. 또한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도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태어날 당시 지명은 조슈번이었다.

 

 

알본 역대 총리 68명 중 9명 야마구치현 출신
알본 역대 총리 68명 중 9명 야마구치현 출신

 

 

시대적 배경

이토 히로부미가 태어난 19세기 중반 일본은 무사정권이었고 막부시대였다. 이토가 태어난 시기는 애도 막부시대 말기로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당시 농부는 상대적으로 하층 계급이었다. 에도막부시대 가장 상위에 천황이 있었으나 상징적인 존재일뿐 실제 권력은 막부에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출신은 에도 막부 계급의 가장 하층민 농민의 자녀로 태어났다. 이런 이초히로부미가 농민의 아들에서 일본의 총리로 신분상승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했을까?  

 
이토 히로부미 어린 시절 시대 상황
당시 일본의 거대한 변화에 휩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12 살이었던 1853년 7월 일본 앞바다에는 일본을 문명화된 나라로 만들겠다고 미국의 함선이 개항을 요구하고 나타났다. 결국 1858년 7월에 막부와 미국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은 항구를 강제로 개항하고 미국이 체류중에 죄를 저지르면 일본이 아닌 자국의 재판을 받는 영사재판권을 인정해야 했다. 그 여파는 일본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미일수호통상조약 내용
미일수호통상조약 내용



독단적으로 조약을 체결한 막부 세력의 불만이 커지면서 이들에 대항하는 반 막부파가 힘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가 태어난 조슈번은 반막부파의 중심이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서구열강의 침입과 일본 내부 분열 속에서 10대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운명을 바꾸는 요시다 쇼인을 만나게 된다.  

 
요시다 쇼인은 누구? 
요시다 쇼인은 아베 전 총리의 정신적 지주이자 일본 침략사상의 뿌리가 되는 인물이다. 요시다 쇼인은 서양의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서양식에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해외침략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일본 침략사상에 뿌리를 만든 인물이다. 그는 조슈번에서 자신의 사상을 가르치며 제자들을. 키우고 있었고 17 살에 이토 히로부미도 요시다의 제자로 입문하게 된다.

 

 

 

요시다 쇼인 정한론, 존왕양이 조선 침략 발상의 근간 (미국 따라한 죄?!)[벌거벗은 세계사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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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는 신조아베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는 신조아베

 

존왕양이 사상이란? 

훗날 이토 히로부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존왕양이' 사상이었다. 서양을 받들고(존왕) 오랑캐를 배척한다(양이)는 사상이다. 반막부파들. 사이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천황이라는 존재만이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이다. 존왕양이 사상과 함께 다양한 각도에서 세계정세를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조왕양이 정의
조왕양이란


 
이토 히로부미는 왜 테러리스트가 되었나? 
1859년 11월 21일 이토 히로부미가 19세 되던 해 스승으로 받들던 요시다 쇼인이 갑작스럽게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일본을 통치해오던 막부세력이 자신의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반 막부파의 인사들을 숙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양과 조약을 맺은 막부를 강력하게 비판했던 요시다 쇼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요시다 쇼인이 처형을 당한 후 이토히로부미는 스승의 시체를 거두러 갔는데 그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한 상태였다. 존경하는 스승의 비참한 죽음을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에겐 존왕양이 사상이 더욱 크게 가슴에 자리잡게 된다. 존왕양이 운동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테러리스트가 되기로 한다.  

1863년 23세 테러리스트의 이토 히로부미
1863년 23세 테러리스트의 이토 히로부미

 

이토의 테러리스트 활동

테러리스트가 된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주재 영국 공사관에 방화를 하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1863년 1월 30일 일 완공 직전인 고텐야마 영국 공사관(현재 도쿄 시나가와)에 침입해 폭탄을 설치한 후 건물을 폭파시켰다. 이들은 자신의 테러를 자축하면서 잔치를 벌였고 당시 민심도 외국공사관 건설을 반대했기 때문에 오히려 환영을 받았던 이토 히로부미의 테러였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더 대담한 테러를 벌인다.  이토 히로부미는 막부가 천황을 폐위시키려고 한다고 생각했고 천황 폐위에 동조한 학자를 살해하기로 한 것이다. 역대 일본총리 중 전쟁을 제외하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이토히로부미가 유일하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총리 이력 뒤에 숨겨진 이토 히로부미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암살 사건을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는 존왕양이의 공을 인정받아 정식 무사 신분까지 계급이 상승하게 된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만의 능력으로 신분이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이토는 승진을 거듭하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벌거벗은 세계사 71-1]

 

다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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